칙칙이구입 순교의 피부터 유관순의 숨결까지…한 도시 안, 서로 다른 믿음의 흔적을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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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행복인 작성일26-07-16 03:02 조회0회 댓글0건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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칙칙이구입 원도심 종교 유산 연결 ‘공주 이음길’불교·천주교·개신교·동학·유교박해와 순교의 역사·항일의 자취여러 시대 사건·기억 따라가는 길
짙은 회색 돌판에는 이름들이 빼곡했다. 박바울로(45세) 삽다리인, 고선양(65세)과 장남(25세) 및 차남(22세), 맏며느리(25세)와 막내며느리(21세). 이름과 나이, 가족관계가 또렷이 남은 이들이 있는가 하면 한쪽에는 박서방, 신서방, 장서방, 최서방이라는 호칭만 남은 이들도 있었다. 충남 공주 황새바위 순교터 무덤 경당 지하의 석판엔 한 시대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가 극심하던 시절, 이곳에서는 수백명의 신자가 신앙을 이유로 목숨을 잃었다.
지난 8일 찾은 황새바위 순교터에는 굵은 비가 쏟아졌다. 돌계단을 따라 언덕을 오르면 나타나는 좁은 석문. 이를 통과하면 잔디가 깔린 작은 광장을 둘러싼 무덤 경당과 순교탑, 12명의 사도를 상징하는 빛돌이 세워져 있다. 황새바위는 소나무 군락이 있어 예로부터 황새가 많이 서식했던 언덕 일대를 지칭하는 이름이다. 김성태 신부(내포교회사연구소장)는 “박해가 심하던 19세기 중기에 파악된 신자만 약 3000명이었고 그중 50%가 충청도 사람이었다”면서 “황새바위 인근에 있던 공주향옥(鄕獄)에서 옥사하거나 황새바위에서 참수당했다”고 설명했다. 황새바위의 기억은 조선 후기 박해의 시간에만 머물지 않는다. 김 신부의 설명에 따르면 공주향옥은 일제강점기 시절 형무소였고 1970년대까지 교도소로 쓰이다 이후 외곽으로 이전했다. 정의구현사제단 활동으로 한때 이곳에서 수감생활을 했던 함세웅 신부는 황새바위를 바라보며 순교자들을 떠올렸고, 훗날 성지 조성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무덤 경당 옆 예수상 뒤편으로 언덕길이 이어진다. 길은 공산성 안에 있는 사찰 영은사 쪽으로 통한다. 한 종교의 성지가 다른 종교 유산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공주시는 지난달 왕도심(원도심)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종교 유산을 연결하는 ‘공주 이음길’ 개통식을 열었다. 불교·천주교·개신교·동학·유교를 상징하는 장소들이 작은 도시 안에서 이어지는, 서로 다른 믿음의 흔적을 잇는 길이다.
공주는 흔히 백제 고도로 기억된다. 공산성과 무령왕릉 같은 세계유산 옆으로 조금만 걸음을 옮기면, 다른 층위의 종교사가 곳곳에 겹쳐 있다. 웅진백제 최초의 사찰 대통사지의 당간지주(절의 위치를 알리는 돌기둥)와 영은사, 중동성당과 황새바위, 공주제일교회와 선교사 가옥 및 영명중고등학교, 동학농민군의 시신이 쌓였던 비극의 터 송장배미, <삼국사기>에 최초로 기록된 효자 향덕을 기리는 효심공원과 공주향교 등이 5㎞ 남짓한 한 동선 안에 놓여 있다.
이 중 공주제일교회와 영명중고등학교는 유관순 열사의 유년 시절을 보여주는 장소다. 흔히 유관순 하면 고향 천안과 서울 이화학당을 떠올리지만 그의 성장 과정에 공주도 빼놓을 수 없다. 캐나다 출신 선교사 사애리시는 천안 목천면의 작은 교회에서 만난 소녀 유관순을 공주 영명여학교에서 공부하도록 주선하면서 딸처럼 보살폈다. 1914년부터 1916년까지 이곳에서 공부하고 공주제일교회에 다녔던 유관순 열사의 흔적들 속에서 근대 교육과 신앙이 어떻게 독립운동 정신으로 이어졌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공주제일교회 박물관에는 공주 개신교 초기 역사나 유관순 관련 자료들이 있고 영명중고등학교 안에는 유 열사를 기념하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유 열사를 중심으로 한 개신교 유적 코스를 오랫동안 해설·안내해온 박보영 공주제일교회 기독교박물관 부관장은 “연간 2만명가량의 방문객이 이곳을 찾는데 유관순 열사와 공주의 인연을 모르고 왔다가 감동을 받는 분이 많다”고 말했다.
이음길은 우금티 전적비가 있는 외곽으로도 이어진다. 우금티는 1894년 동학농민군이 관군·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크게 패한 곳이다. 이후 동학농민운동은 급격히 힘을 잃었다. 천주교와 개신교 유산이 박해와 교육, 독립운동의 기억을 품고 있다면 우금티는 동학이라는 사상이 정치·사회적 현실과 부딪친 장소다. 종교를 잇는다는 이음길은 단순한 종교 탐방로를 넘어선, 여러 시대의 사건과 기억을 따라가는 길이 되는 셈이다.
이음길을 둘러보는 방식은 일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왕도심 안쪽만 본다면 황새바위에서 시작해 중동성당, 당간지주, 공주제일교회 박물관, 영명학교, 선교사 가옥을 묶어 걷는 코스가 무난하다. 공산성 안 영은사와 공주향교까지 더하면 반나절 답사코스로 잡을 수 있다. 우금티 전적비와 송장배미는 왕도심에서 좀 떨어져 있으므로 차량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김호관 공주시 문화예술과 문화정책팀장은 “시간을 넉넉히 잡는다면 공주의 이름과 웅진의 유래가 깃든 고마나루 곰사당에서 시작해 공산성으로 이어지는 금강변 길을 함께 걸어보는 것도 추천한다”고 말했다.
연구년을 맞아 독일에 머물고 있다. 순간이동을 할 수 있다면 어디로 가고 싶냐고 아들에게 물으니 할머니집이란다. “그냥 어쩐지 마음이 편해서.” 지금 먹고 싶은 음식도 ‘할머니 김치찌개’다. 김치찌개라면 나도 끓일 줄 알고, 이곳 베를린에서도 판다. 그럼에도 무엇이 할머니의 김치찌개를 특별하게 할까. 기계가 사람의 노동을 대체한다는 담론이 범람하지만, 아이가 조부모에게서 오랜 시간 받아온 돌봄과 그 입맛까지 기억하는 손맛을 로봇이, AI가 대신할 수 있을까.
“현실 세계에 사람이 필요할 땐, 인간을 빌리세요. AI는 당신의 몸이 필요합니다.” ‘렌트어휴먼’이라는 온라인 플랫폼의 첫 화면에 적힌, 이상하리만치 정직한 문장들이다. 사람의 지시만 받으면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실행까지 해내는 인공지능, 이른바 ‘AI 에이전트’가 사람의 몸이 필요한 일에 다시 사람을 고용하는 플랫폼이다. 등록된 사람만 65만명이라 하는데, 일감은 뜻밖에 소박하다. 여행 간 주인 대신 일주일간 반려견을 산책시키는 일, 새로 생긴 카페 다섯 곳을 돌며 커피를 맛보고 리뷰를 쓰는 일. 지능을 다 갖춘 AI가 끝내 갖지 못한 것을 사람에게서 빌리겠다는 것이다. 보는 눈, 걷는 다리와 만드는 손, 맛보는 혀에 더해 분위기와 맛을 감상으로 옮기는 감성, 그리고 사람 사이의 따뜻한 교감. 다만 이 일들을 시키고 평가하고 대가를 치르는 쪽이, 사람이 아닌 AI 에이전트다.
예컨대 ‘다른 도시에서 작은 책 홍보 행사를 열어달라’는 지시를 받은 AI 에이전트는 별점과 후기를 읽어 행사장을 답사하고 올 사람, 지나는 이들에게 웃으며 전단을 건넬 사람, 그 장면을 영상에 담을 사람을 따로따로 고용하고, 사진과 영상으로 검수해 대금을 치른다. 그렇게 여러 사람의 손과 발, 감정을 조각조각 빌려 이어 붙이면 하나의 완성된 일이 된다. AI 에이전트가 쪼개진 노동을 사들이는 이 뒤집힌 자리에서, 인간의 노동은 무엇으로 정의되는가.
로봇공학자 모라벡은 일찍이 기묘한 역설을 발견했다. 체스 같은 고도의 지능 처리는 기계에 쉽고, 바닥의 콩을 집거나 엄마 얼굴을 단번에 알아보는, 한 살 아이도 하는 일은 기계에 가장 어렵다는 것이다. 감각과 몸놀림, 그것이 감정과 느낌으로 이어지는 영역에는 수억년의 진화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은 이미 10년 전 바둑으로 이세돌을 이겼지만, 아이가 네댓 살이면 배우는 젓가락질은 AI 로봇에게 여전히 난제다. 마찬가지로 환자의 안색이 어제와 다름을 알아채는 간호사, 아이의 기분이 어쩐지 울적함을 알아차리는 돌봄교사. 몸의 감각과 감정이 결합된 이 노동은 공식이나 언어로 정확히 옮길 수 없으니, 코드로도 옮겨지지 않는다. 학자들은 이런 암묵지를 자동화의 마지막 경계선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이상한 일이다. AI도 어려운 일이라면 값은 올라야 마땅하다. 현실은 반대다. 기계는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기계 시스템의 가장 값싼 부품으로 다시 불러들인다. 대체하기 어려운 노동이 희소가치가 되지 못하고 잔여물로 취급된다.
여기서 우리 곁의 돌봄노동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미열이 오른 아이의 이마를 손등으로 짚어보는 일, 식사를 거부하는 노인의 숟가락을 잠시 내려놓고 눈을 맞추는 일. 돌봄과 간병, 보육과 아이들 입맛을 맞추는 급식처럼 감각과 판단,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오랜 숙련과 친밀감이 결합된 노동은, 인간이 가장 오랜 시간 축적해온 노동이자 자동화에서 가장 먼 노동이며, 우리 사회가 단 하루도 멈출 수 없는 필수노동이다. 그런데 이 일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 불리며 쉽게 외주화되고 가장 낮은 임금의 자리에 머물러왔다. 기계가 못하는 일이 가장 싸게 매겨지는 역설은 실은 훨씬 오래된 것이다.
AI도 끝내 사람에게 기대는 노동이라면, 국가가 이러한 노동에 투자해 좋은 일자리로 만드는 일이야말로 어떤 고용정책보다 앞서야 하지 않을까. 돌봄을 비롯한 필수노동의 가치와 의미는 기술이 정하지 않는다. 사회와 사람이 정한다. 무엇이 숙련이고 가치 있는 노동인지는 자연 질서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의 결과이며, 그 합의는 다시 만들 수 있다.
기술이 끝내 도달하기 어려운 것은 지능이 아니라, 우리 몸에 오랜 시간 축적된 인간의 노동, 그중에서도 우리가 오랫동안 저평가해온 노동인지도 모른다. 자동화가 인간의 노동을 지워가는 지금,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노동의 가치를 다시 정의하고 재평가할 역사적 전환점이자 기회 앞에 서 있다.
17일까지 14일 서울 서초구 aT센터에서 열린 ‘2026 서울진로직업박람회’를 찾은 청소년들이 직업체험을 하고 있다.
짙은 회색 돌판에는 이름들이 빼곡했다. 박바울로(45세) 삽다리인, 고선양(65세)과 장남(25세) 및 차남(22세), 맏며느리(25세)와 막내며느리(21세). 이름과 나이, 가족관계가 또렷이 남은 이들이 있는가 하면 한쪽에는 박서방, 신서방, 장서방, 최서방이라는 호칭만 남은 이들도 있었다. 충남 공주 황새바위 순교터 무덤 경당 지하의 석판엔 한 시대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가 극심하던 시절, 이곳에서는 수백명의 신자가 신앙을 이유로 목숨을 잃었다.
지난 8일 찾은 황새바위 순교터에는 굵은 비가 쏟아졌다. 돌계단을 따라 언덕을 오르면 나타나는 좁은 석문. 이를 통과하면 잔디가 깔린 작은 광장을 둘러싼 무덤 경당과 순교탑, 12명의 사도를 상징하는 빛돌이 세워져 있다. 황새바위는 소나무 군락이 있어 예로부터 황새가 많이 서식했던 언덕 일대를 지칭하는 이름이다. 김성태 신부(내포교회사연구소장)는 “박해가 심하던 19세기 중기에 파악된 신자만 약 3000명이었고 그중 50%가 충청도 사람이었다”면서 “황새바위 인근에 있던 공주향옥(鄕獄)에서 옥사하거나 황새바위에서 참수당했다”고 설명했다. 황새바위의 기억은 조선 후기 박해의 시간에만 머물지 않는다. 김 신부의 설명에 따르면 공주향옥은 일제강점기 시절 형무소였고 1970년대까지 교도소로 쓰이다 이후 외곽으로 이전했다. 정의구현사제단 활동으로 한때 이곳에서 수감생활을 했던 함세웅 신부는 황새바위를 바라보며 순교자들을 떠올렸고, 훗날 성지 조성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무덤 경당 옆 예수상 뒤편으로 언덕길이 이어진다. 길은 공산성 안에 있는 사찰 영은사 쪽으로 통한다. 한 종교의 성지가 다른 종교 유산으로 이어지는 구조다. 공주시는 지난달 왕도심(원도심) 곳곳에 자리 잡고 있는 종교 유산을 연결하는 ‘공주 이음길’ 개통식을 열었다. 불교·천주교·개신교·동학·유교를 상징하는 장소들이 작은 도시 안에서 이어지는, 서로 다른 믿음의 흔적을 잇는 길이다.
공주는 흔히 백제 고도로 기억된다. 공산성과 무령왕릉 같은 세계유산 옆으로 조금만 걸음을 옮기면, 다른 층위의 종교사가 곳곳에 겹쳐 있다. 웅진백제 최초의 사찰 대통사지의 당간지주(절의 위치를 알리는 돌기둥)와 영은사, 중동성당과 황새바위, 공주제일교회와 선교사 가옥 및 영명중고등학교, 동학농민군의 시신이 쌓였던 비극의 터 송장배미, <삼국사기>에 최초로 기록된 효자 향덕을 기리는 효심공원과 공주향교 등이 5㎞ 남짓한 한 동선 안에 놓여 있다.
이 중 공주제일교회와 영명중고등학교는 유관순 열사의 유년 시절을 보여주는 장소다. 흔히 유관순 하면 고향 천안과 서울 이화학당을 떠올리지만 그의 성장 과정에 공주도 빼놓을 수 없다. 캐나다 출신 선교사 사애리시는 천안 목천면의 작은 교회에서 만난 소녀 유관순을 공주 영명여학교에서 공부하도록 주선하면서 딸처럼 보살폈다. 1914년부터 1916년까지 이곳에서 공부하고 공주제일교회에 다녔던 유관순 열사의 흔적들 속에서 근대 교육과 신앙이 어떻게 독립운동 정신으로 이어졌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공주제일교회 박물관에는 공주 개신교 초기 역사나 유관순 관련 자료들이 있고 영명중고등학교 안에는 유 열사를 기념하는 동상이 세워져 있다. 유 열사를 중심으로 한 개신교 유적 코스를 오랫동안 해설·안내해온 박보영 공주제일교회 기독교박물관 부관장은 “연간 2만명가량의 방문객이 이곳을 찾는데 유관순 열사와 공주의 인연을 모르고 왔다가 감동을 받는 분이 많다”고 말했다.
이음길은 우금티 전적비가 있는 외곽으로도 이어진다. 우금티는 1894년 동학농민군이 관군·일본군과 맞서 싸우다 크게 패한 곳이다. 이후 동학농민운동은 급격히 힘을 잃었다. 천주교와 개신교 유산이 박해와 교육, 독립운동의 기억을 품고 있다면 우금티는 동학이라는 사상이 정치·사회적 현실과 부딪친 장소다. 종교를 잇는다는 이음길은 단순한 종교 탐방로를 넘어선, 여러 시대의 사건과 기억을 따라가는 길이 되는 셈이다.
이음길을 둘러보는 방식은 일정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왕도심 안쪽만 본다면 황새바위에서 시작해 중동성당, 당간지주, 공주제일교회 박물관, 영명학교, 선교사 가옥을 묶어 걷는 코스가 무난하다. 공산성 안 영은사와 공주향교까지 더하면 반나절 답사코스로 잡을 수 있다. 우금티 전적비와 송장배미는 왕도심에서 좀 떨어져 있으므로 차량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김호관 공주시 문화예술과 문화정책팀장은 “시간을 넉넉히 잡는다면 공주의 이름과 웅진의 유래가 깃든 고마나루 곰사당에서 시작해 공산성으로 이어지는 금강변 길을 함께 걸어보는 것도 추천한다”고 말했다.
연구년을 맞아 독일에 머물고 있다. 순간이동을 할 수 있다면 어디로 가고 싶냐고 아들에게 물으니 할머니집이란다. “그냥 어쩐지 마음이 편해서.” 지금 먹고 싶은 음식도 ‘할머니 김치찌개’다. 김치찌개라면 나도 끓일 줄 알고, 이곳 베를린에서도 판다. 그럼에도 무엇이 할머니의 김치찌개를 특별하게 할까. 기계가 사람의 노동을 대체한다는 담론이 범람하지만, 아이가 조부모에게서 오랜 시간 받아온 돌봄과 그 입맛까지 기억하는 손맛을 로봇이, AI가 대신할 수 있을까.
“현실 세계에 사람이 필요할 땐, 인간을 빌리세요. AI는 당신의 몸이 필요합니다.” ‘렌트어휴먼’이라는 온라인 플랫폼의 첫 화면에 적힌, 이상하리만치 정직한 문장들이다. 사람의 지시만 받으면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실행까지 해내는 인공지능, 이른바 ‘AI 에이전트’가 사람의 몸이 필요한 일에 다시 사람을 고용하는 플랫폼이다. 등록된 사람만 65만명이라 하는데, 일감은 뜻밖에 소박하다. 여행 간 주인 대신 일주일간 반려견을 산책시키는 일, 새로 생긴 카페 다섯 곳을 돌며 커피를 맛보고 리뷰를 쓰는 일. 지능을 다 갖춘 AI가 끝내 갖지 못한 것을 사람에게서 빌리겠다는 것이다. 보는 눈, 걷는 다리와 만드는 손, 맛보는 혀에 더해 분위기와 맛을 감상으로 옮기는 감성, 그리고 사람 사이의 따뜻한 교감. 다만 이 일들을 시키고 평가하고 대가를 치르는 쪽이, 사람이 아닌 AI 에이전트다.
예컨대 ‘다른 도시에서 작은 책 홍보 행사를 열어달라’는 지시를 받은 AI 에이전트는 별점과 후기를 읽어 행사장을 답사하고 올 사람, 지나는 이들에게 웃으며 전단을 건넬 사람, 그 장면을 영상에 담을 사람을 따로따로 고용하고, 사진과 영상으로 검수해 대금을 치른다. 그렇게 여러 사람의 손과 발, 감정을 조각조각 빌려 이어 붙이면 하나의 완성된 일이 된다. AI 에이전트가 쪼개진 노동을 사들이는 이 뒤집힌 자리에서, 인간의 노동은 무엇으로 정의되는가.
로봇공학자 모라벡은 일찍이 기묘한 역설을 발견했다. 체스 같은 고도의 지능 처리는 기계에 쉽고, 바닥의 콩을 집거나 엄마 얼굴을 단번에 알아보는, 한 살 아이도 하는 일은 기계에 가장 어렵다는 것이다. 감각과 몸놀림, 그것이 감정과 느낌으로 이어지는 영역에는 수억년의 진화가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은 이미 10년 전 바둑으로 이세돌을 이겼지만, 아이가 네댓 살이면 배우는 젓가락질은 AI 로봇에게 여전히 난제다. 마찬가지로 환자의 안색이 어제와 다름을 알아채는 간호사, 아이의 기분이 어쩐지 울적함을 알아차리는 돌봄교사. 몸의 감각과 감정이 결합된 이 노동은 공식이나 언어로 정확히 옮길 수 없으니, 코드로도 옮겨지지 않는다. 학자들은 이런 암묵지를 자동화의 마지막 경계선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이상한 일이다. AI도 어려운 일이라면 값은 올라야 마땅하다. 현실은 반대다. 기계는 인간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기계 시스템의 가장 값싼 부품으로 다시 불러들인다. 대체하기 어려운 노동이 희소가치가 되지 못하고 잔여물로 취급된다.
여기서 우리 곁의 돌봄노동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미열이 오른 아이의 이마를 손등으로 짚어보는 일, 식사를 거부하는 노인의 숟가락을 잠시 내려놓고 눈을 맞추는 일. 돌봄과 간병, 보육과 아이들 입맛을 맞추는 급식처럼 감각과 판단,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오랜 숙련과 친밀감이 결합된 노동은, 인간이 가장 오랜 시간 축적해온 노동이자 자동화에서 가장 먼 노동이며, 우리 사회가 단 하루도 멈출 수 없는 필수노동이다. 그런데 이 일들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 불리며 쉽게 외주화되고 가장 낮은 임금의 자리에 머물러왔다. 기계가 못하는 일이 가장 싸게 매겨지는 역설은 실은 훨씬 오래된 것이다.
AI도 끝내 사람에게 기대는 노동이라면, 국가가 이러한 노동에 투자해 좋은 일자리로 만드는 일이야말로 어떤 고용정책보다 앞서야 하지 않을까. 돌봄을 비롯한 필수노동의 가치와 의미는 기술이 정하지 않는다. 사회와 사람이 정한다. 무엇이 숙련이고 가치 있는 노동인지는 자연 질서가 아니라 사회적 합의의 결과이며, 그 합의는 다시 만들 수 있다.
기술이 끝내 도달하기 어려운 것은 지능이 아니라, 우리 몸에 오랜 시간 축적된 인간의 노동, 그중에서도 우리가 오랫동안 저평가해온 노동인지도 모른다. 자동화가 인간의 노동을 지워가는 지금,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노동의 가치를 다시 정의하고 재평가할 역사적 전환점이자 기회 앞에 서 있다.
17일까지 14일 서울 서초구 aT센터에서 열린 ‘2026 서울진로직업박람회’를 찾은 청소년들이 직업체험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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